포스트맑스주의 이후 좌파 이론의 최전선 내가 쓴 것






 













주디스 버틀러, 에르네스토 라클라우, 슬라보예 지젝, 박대진․박미선 옮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 - 좌파에 대한 현재적 대화들>, 도서출판 b, 2009.



김정한

 

 

아마 맑스주의 사상사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필적하는 악명이 있다면 라클라우의 ‘포스트맑스주의’일 것이다. 둘 다 맑스주의를 해체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배반하는 이단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고, 읽을 가치가 없는 궤변인양 조롱거리로 회자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대의 쟁쟁한 이론가들과 격렬한 논쟁을 전개하면서 점진적으로 사회운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도 둘은 닮았다. 수정주의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실질적인 이론적 기초였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을 수용하는 거의 모든 진보정당의 암묵적 준거가 되었다. 포스트맑스주의는 환경운동과 페미니즘을 필두로 한 다양한 신사회운동들의 전형적인 이론적 기초였고, 급진민주주의 전략은 여러 형식의 판본들로 산개하며 거의 모든 진보운동의 거부할 수 없는 암묵적 참조점이 되었다. 가령, 분명하게 ‘민주주의의 급진화’를 연상케 하는 ‘민주주의의 민주화’는 포스트맑스주의의 토착화된 판본이 아닌가?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주의 이론가인 최장집이 라클라우를 직접 내세운 적은 없지만, 그람시주의자를 자임하는 라클라우 못지않게 최장집의 (특히 ‘초기’) 저술들에 그람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그저 우연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좌파 이론가들 가운데 세 사람이 공동 저술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1999)은, 출간 이후 이론적 실천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온 포스트맑스주의의 고전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1985)에 대한 정치철학적 재성찰이자 전면적인 비판이다. 그래서 책의 후반부로 갈수록 거의 욕설에 가까운 언사들도 튀어나오고, 실제로 라클라우와 지젝은 이 공동 작업을 끝으로 기존의 우호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결별하기도 한다. 라클라우의 <인민주의 이성>(On Populist Reason, 2005)을 둘러싼 두 사람의 격한 후속 논쟁에서는 이 책에서 풍기는 대가다운 품격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니, 친분 두터운 사상가들의 한가로운 객담을 읽고 싶은 독자들은 이 책을 펼쳐보지 않는 게 좋겠다.

제명으로 올라온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은 포스트맑스주의가 제시한 핵심 개념들이다. 우연성은 진화론 내지 진보사관이 전제하는 필연성에 대립하고, 헤게모니는 주체-위치를 경제관계로 환원하는 경제결정론에 대립하며, 보편성은 다양한 형식의 특수성(성, 인종, 생태, 종교 등) 그 자체에서 해방 정치의 가능성을 찾는 특수주의에 대립한다. 여기서 특히 보편성은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이라는 세 개념 가운데 하나이면서, 우연성과 헤게모니라는 나머지 두 개념을 결정하는 일종의 ‘최종심급’이다. 보편성이 없다면 어떤 정치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보편성은 차이를 억압하고 소수성을 배제하는 범주로서 기각되었지만, 세 저자들은 포함과 배제의 그물망을 재배치하는 새로운 보편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해방 정치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이론적 지반을 공유하고 있다. 다만, 결정론적 필연성을 갖는 선험적 보편성은 없으며 오직 우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소급적 보편성만 존재할 뿐이기 때문에, 어떤 관점에서 보편성을 보느냐에 따라 세 저자들 사이에는 객관화할 수 없는 시차(parallax)가 나타난다.

우선 버틀러는 다양한 문화 규범에 따라 보편성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점에 주목하고(따라서 해방적 보편성을 위해서는 문화적 번역이 필수적이다), 문화 규범에 새겨진 보편성 담화들의 숨겨진 배제성을 드러냄으로써 보편성에 관한 새로운 정식화를 생산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확립된 보편성 담화와 그 배제성 간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은 패러디적 반복이다. 예컨대 복장 도착인 드래그(drag)처럼 이성애적 정체성을 패러디하여 수행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그것이 갖는 포함과 배제의 경계를 재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보편성과 문화 간의 연계를 중시하기 때문에, 버틀러는 상징계의 형식적 구조에서 도출되는 라캉의 빗금 그어진 주체(barred subject)가 역사적 문화를 초월한(결국 정치 과정과 무관한) 보편성을 상정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라클라우는 보편성은 기의가 없는, 비어 있는 기표이며, 그에 상응하는 빗금 그어진 결여의 주체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한 맑스의 상품 개념처럼) 상징계의 작동을 분석하는 데 필수적인 추상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보편성은, 보편적 대표를 자임하는 특수성이 다른 특수한 부문들을 등가연쇄로 묶어내는 헤게모니적 실천을 통해 보편성의 비어 있는 자리를 차지할 때 확립되는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보편성이다. 따라서 어떤 특수성이 보편성의 자리를 점유할 것인가는 여러 특수성들 간의 우연적인 정치적 경쟁에 달려 있다. 또한 라클라우는, 버틀러의 패러디적 수행이 지배적 규범과 그에 근거한 행위 간의 간극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사실상 모든 사회적 행위가 다 패러디적이라고 비판하고, 자신이 말하는 헤게모니적 실천에는 특수한 목표를 보편화하는 과정에서 서술과 규범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윤리적 결단이 수반된다고 강조한다.

지젝도 라클라우처럼 보편성을 비어 있는 기표로 보고, 특수성에 의해 채워지는 보편성의 우연적 성격을 인정하지만, 급진민주주의를 위한 헤게모니적 실천이 계급 적대를 암묵적으로 부인하고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문제 삼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라클라우가 주어진 역사적 지평 내에서 전개되는 우연성(헤게모니적 실천)과 이 지평 자체를 구성하는 근본적 배제(계급투쟁)를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규칙에는 항상 특수한 예외가 있듯이, 계급투쟁은 성, 인종, 생태 등 여러 특수성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비어 있는 기표로 구성하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예외적 특수성이다(이는 분명히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과 유사하며, 이런 점에서 지젝이 동원하는 ‘헤겔의 변증법’은 사실상 알튀세르가 제기한 ‘맑스의 변증법’에 근접해 있다). 즉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계급 적대를 제거하는 한에서 헤게모니 투쟁의 전장이다. 따라서 지젝에 따르면 본연의 정치적 행위(political act)는 자본주의 지평 내에서의 이런저런 헤게모니 투쟁이 아니라 그 지평 자체를 전복하는 반자본주의 투쟁이다.

보편성을 둘러싼 세 저자들의 이런 시차를 일목요연하게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라캉의 상상, 상징, 실재라는 도식을 빌려 각각 상상적 보편성, 상징적 보편성, 실재적 보편성이라는 잠정적인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요컨대 버틀러는 (패러디의 동력이 상상인 한에서) 상상계의 관점에서 상징계를 재의미화하는 상상적 보편성을 강조하고, 라클라우는 (비어 있는 기표의 전유가 문제인 한에서) 상징계의 관점에서 상징계를 재배치하는 상징적 보편성에 주목하고, 지젝은 (계급투쟁이 곧 실재인 한에서) 실재의 관점에서 새로운 상징계를 창안하기 위해 실재적 보편성을 단언하고 있다고 말이다.

이 책은 포스트맑스주의 이후, 특히 헤겔과 라캉을 가공하여 첨단 개념들을 장착한 좌파 이론의 최전선을 좌충우돌의 묘미를 더해 선보이고 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반드시 최전선에 뛰어들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면, 그만큼 이론적, 실천적 전황을 돌파하는 데 유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추측컨대 어둠속에서 바늘을 찾는 미친 짓 같았을 번역을 맡아 읽을 수 있는 책을 만들어준 옮긴이들의 정성에 심심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다.

 

 

<문화과학> 59호,  2009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