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사유의 반란 내가 쓴 것

<실천문학> 103(2011년 가을)

 

 

슬라보예 지젝, 사유의 반란

 

 

김정한(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말들의 무간도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을 읽던 시대가 있었다. 계급투쟁, 혁명,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하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사회운동 체제로서 ‘1980년대가 소멸한 후에 한국 사회의 상징 질서에서 그런 단어들을 위한 좌표는 사라졌다. 대신에 시민사회, 선거,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들이 일방통행로(one way street)를 내달렸다. 언어의 세계를 구획하는 좌표들이 근원적으로 뒤바뀐 것이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좋았던 옛시절의 말들은 낡고 촌스럽게만 들렸다. 이 새로운 말들의 풍경은 맑스주의의 위기라고 불리더니 곧이어 모든 인문학의 위기로 진단되었다.

다음 시대에는 얼마간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세를 차지했지만 그것이 반지성주의의 알리바이로 판명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한동안 자유민주주의의 승리와 역사의 종말이 회자되었고,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합리성이 우리가 겨우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가치인 것처럼 생각되었으며, 그에 입각해 있다고 여겨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라는 제3의 길이 허장성세를 누렸다. 반면에 이론과 지식인에 대한 환멸에 공감하는 이들은 한때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부르디외를 표본으로 삼았지만 그에게서 계급 구별을 재생산하는 문화적 아비투스(habitus)를 넘어설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얄궂게도 애초에 맑스주의의 위기를 선언한 바 있는 알튀세르와 그의 학파는 바로 그 위기로 인해 지식사회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를 흡수한 후예들은 푸코와 데리다에 잠시 머물렀다가 들뢰즈(와 가타리)로 급속히 옮겨갔으며, 들뢰즈 철학을 정치적으로 번역한 네그리(와 하트)가 좌파 이론가들 사이에서 판정승을 올렸다.

이와 같은 혼돈의 지형에서 라캉의 이름이 빠져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울 수도 있다. 하지만 라캉의 텍스트들은 지금도 여전히 해석되는 와중에 있고, 무엇보다 그의 정치적 보수주의에서는 어떤 매력도 찾을 수 없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맑스주의(급진민주주의)가 학계의 집중포화를 맞고 학술적으로 검토되지도 못했을 때, 그들이 라캉을 주요하게 참조했다는 사실에 아무도 주목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한국에 소개된 포스트맑스주의 논쟁의 한 귀퉁이에서 가까스로 발견되는 지젝은 라캉을 기이하게 해석하는 라클라우의 지적 동료일 뿐이었다.

 
zizek_2011.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