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기토> 71호,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2012년 2월)
에티엔 발리바르, 진태원 옮김, <정치체에 대한 권리>, 후마니타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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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 속에서 철학하기: 시민권, 사회변혁, 시민다움
김정한(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 전능한 자의 무기력
어떤 사상이나 철학이 수용되는 역사를 살펴보면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양 취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맑스와 엥겔스이겠지만,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도 다르지 않다. 실제로 냉전 시대에 비판적 맑스주의를 이끌었던 알튀세르와 그의 충실한 제자인 발리바르는 정통 맑스주의와 거리를 두면서도 포스트 담론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유력한 좌파적 입장 가운데 하나였다. 이 때문에 한동안 국내에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계승자였을 뿐 독자적인 사상을 제시한 철학자로 인식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이미 1980년대부터 발리바르는 점차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제설정을 제시해왔으며,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발리바르가 고민하는 최근의 주요 논점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저작이다.
더구나 이 책에 묶인 글들은 일간지에 실린 짧은 기고문이거나, 영화인이나 작가 등 예술인들이 초대한 모임에서 발제한 발표문, 대중적인 강연회의 원고들이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와 같이 아카데미의 울타리를 넘어서 대중들과 소통하는 발리바르의 면모는 당면한 정세적인 쟁점들에 철학적으로 개입하려는 발리바르의 철학하는 태도에서 유래한다. 물론 일찍이 알튀세르는 철학을 “이론에 대한 정치적 개입이자 정치에 대한 이론적 개입”이라고 정의한 바 있지만, 발리바르는 하나의 체계적인 사상을 만들어내는 데 진력하기보다는 정치적인 쟁점들을 사유하는 타당한 관점과 이를 실천하는 적합한 입장을 탐구하는, 이를테면 ‘정세 속의 철학’을 부단히 추구해왔다.
발리바르가 분석하는 현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전능한 자의 무기력”이다. 여기서 전능하면서 무기력한 자는 국가를 가리킨다. 국가가 전능한 이유는 근대국가에 존재하는 시민권과 국적의 등가성(시민권=국적)으로 인해 시민권을 갖는다는 것은 곧 국민국가에 소속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국적이 없다면 시민권도 없으며 사실상 누구도 국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가 무기력한 이유는 특히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이후 세계경제를 좌우하는 금융의 흐름을 규제하지 못하고, 이와 결부되어 있는 국가 자율성의 침식으로 인해 국가 자신의 타락과 부패를 개혁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 “전능한 자의 무기력”은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정치적인 무기력 증후군으로 귀결한다.
시민들에 대해서는 너무 많은 힘을 가진 국가(…)가 세계경제의 장에서는 무기력한 국가로 존재하며, 자기 자신을 개혁하는 데도 무기력하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전능한(주권적) 인민은 ‘자신의’ 정부, 자신의 ‘장관들’, 자신의 정치적 ‘대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무기력하며(왜냐하면 모든 정당들은 사소한 차이를 제외하면 동일한 약속들 및 동일한 정책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정치적 대표 역시 더는 사태의 진행에 대한 통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146쪽).
자신의 영토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대처하지 못하는 국가의 무능력과, 더 이상 국가를 통제하지 못하는 시민들의 무기력이 의미하는 것은 정치의 공백과 실종이다. 발리바르는 우선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연합에 속한 국가들을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런 현상은 세계화 이후 한국을 비롯해 수많은 국가들에서 만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좌파 정부 내지 민주 정부들이 국민들이 기대한 개혁 열망에 부응하지 못하고 연이어 실패하는 데에는 이와 같은 구조적 무능력이 놓여 있는 것이다.
2. 주권국가의 전환
집합적인 정치적 무기력의 효과는 매우 파멸적이다. 국가의 무기력에 직면한 시민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자신들이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전”에 대한 불안과 공포이며, 이는 자신들을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타자를 배제하는 정치를 요구하는 것으로 현상한다. 이는 흔히 이주노동자라 불리는 미등록 체류자들에 대한 억압 정책의 지지로 나타나지만, 외국인과 이방인만이 아니라 심지어 동일한 시민들 내부의 타자들(말하자면 다른 견해를 표출하며 배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유럽에서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강력한 제도적 인종주의”가 나타나고, 타자와 적(특히 내부의 적)에 대한 “증오의 이상화”를 정당화하는 서사들이 출현하며,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국민전선’이 대표하는 파시즘이 “국민 우선”이라는 구호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국민 우선”이란 국민의 삶과 안전을 먼저 챙겨야 한다는 뜻으로, 외국인보다 국민이, 국민보다 이웃과 친구가, 이웃과 친구보다 가족이 소중하다는 어쩌면 ‘자명한’ 담론에 기초해 있지만, 타자를 배제하고 때로 인종 청소로까지 나아갈 수 있을 만큼 위험하다. 이것이 자명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국민국가에 내재한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의 논리적 귀결로서, 우리의 국적이 없는 자들은 동일한 시민이 아니므로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는 배제의 논리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위기를 비판하며 국민성 내지 민족성을 재구성하려는 헌정적 애국주의, 나쁜 민족주의가 아닌 좋은 민족주의, 차이에 대한 관용적인 시민 정신 등을 요청하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 결국 시민권=국적이라는 등식이 문제의 핵심에 있으며, 이를 해체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전환시키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정치적인 대안은 국적에 구속되어 있는 시민 공동체를 개방하고 관국민적(transnational) 시민권을 구성하는 방향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국경(경계선)의 민주화라고 지칭할 수도 있다.
국경에 대한 치안적 관점, 곧 국경을 ‘방역선’으로 간주하는 관점 대신, 국경에 대한 정치적 관점 및 실천이 필요하다. 국경을 정치의 장으로 전위시켜서, 더 이상 국경이 모든 반항과 통제, 상호성의 권역 바깥에, 가장자리에 놓이지 않고 중심에 놓이도록 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개인들과 집단들이 오늘날 때로는 국경 이쪽에서, 때로는 저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말하자면 그들이 경계선 양쪽에 걸쳐 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109-110쪽).
이 책의 마지막 논문에서 발리바르는 국가의 전환을 사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인민주권의 징표들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263-268쪽). 첫째, 국가의 재정 권력에 대한 정치적 통제. 이는 사회 정책이 실행되고 사회권이 안착될 수 있는 조건이며, 다국적 기업들의 경제 권력을 통제함으로써 보편적인 과세와 재분배를 가능케 하는 관국민적 경제의 ‘재영토화’이다. 둘째, 문화들과 문명들 간의 공존. 이는 종교, 신념, 세계관 등의 차이에서 비롯하는 사적 갈등들을 규제할 수 있는 조건이며, 여기서 필요한 것은 세계시민들이 신앙과 이데올로기적 정념을 스스로 제어하고 문화적 차이를 용인할 수 있는 새로운 공적 교육의 제도화이다. 셋째, 공적 폭력의 독점이라는 문제. 이는 주권의 가장 비민주주의적인 측면이자 권력의 남성성을 보여주는 징표이며, 팔루스적인 시민 공동체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의 여성화’ 형태에 관해 남성들과 여성들의 공동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와 같이 인민주권의 징표들을 더 민주적으로 전환시키려는 발리바르의 문제설정은 그가 단순히 국가를 부정하거나 기각하는 것도, 또는 국가 상위의 공동체(예컨대 초국적 기구)에 주권을 양도하는 것도 시민 공동체를 새롭게 재구성하고 시민권을 확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3. 정치의 재발명
그렇다면 전능한 자의 무기력이 나타나는 정세에서 주권국가의 전환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정치적 실천이 가능할까? 발리바르는 정치에 대한 유일한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수이면서 상이한 모든 정치적 수준에서 대항해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여기에서도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163-172쪽).
첫째, 시민권. 그러나 이는 ‘우리가 국가의 주인이다’라는 식의 주의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시민권의 핵심인 “권력에 대한 통제”와 “실질적 대표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권력을 통제하는 대항권력과 실질적 대표가 지역적, 국민적, 초국민적인 다수의 층위에서 존재할 때 비로소 시민권은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발리바르는 방리유의 청년들과 미등록 체류자들의 집합적인 시민불복종(désobéissance civique) 운동이 시민권의 장이 축소되지 못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민불복종은 개인들의 고립적인 양심의 표시로 환원될 수 있는 고유한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시민권의 본질적 구성 요소이며 민주주의가 침해되는 상황에서 시민권을 재정초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사회변혁. 이는 조건, 제도, 구조의 변혁을 의미하지만, 세계화된 자본주의를 변혁할 세계적인 정치 주체는 실존하지 않으며, 노동운동은 자신의 이해관계만을 배타적으로 대변하는 한계에 직면했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연대가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강조한다. 국경을 가로지르는 금융화 및 경제 권력의 집중과 그에 따른 실업 및 과잉착취에 맞서는 과정에서, 또한 생태계 문제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여성들의 페미니즘 운동에서 관국민적인 대항권력이 산출될 수 있고 세계화의 조건들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시민다움(civilité). 한동안 ‘시빌리테’라고 음역되면서 번역어 선택과 관련해 혼선이 있던 용어를 옮긴이는 명쾌하게 ‘시민다움’이라고 만들었다. 이는 정체성들 간의 갈등이 극단적인 폭력으로 귀결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문명화하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개인이나 집단이 단 하나의 정체성에만 고착되거나 어떤 정체성도 갖지 못한 채 부유할 때 극단적인 폭력으로 상호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고 경고하면서, 다양한 정체성들 속에서 이동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차이의 권리와 평등의 권리, 연대와 공동체의 권리를 함께 요구할 수 있도록 매개 수단들을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시민다움을 길러내고 경험하도록 매개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근본적인 장소는 학교(시민교육)이며, 또한 브레히트가 ‘거리두기’라고 부른 것을 실행하는 연극(정체성들 간의 갈등을 상연하는 공연장)이다.
이상의 시민권, 사회변혁, 시민다움에 관한 논의는 발리바르가 재구성한 정치의 세 개념(해방의 정치, 변혁의 정치, 시민다움의 정치)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책 전체의 내용은 <우리, 유럽의 시민들?>과 짝을 이루고 있어서 보다 심층적인 전거와 논법을 파악하려고 할 때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정세적 쟁점들과 이와 연관된 철학적 논점들을 다양하고 꼼꼼하게 검토하고 있을 뿐 통쾌하고 손쉬운 단 하나의 해법을 내세우지도 강변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이와 같은 철학하기를 데리다 식의 해체 내지 탈구축(de-construction)이라고 명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양한 지점에서 새로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이 발리바르의 강점이고, 아마 이 책을 읽고 나면 정치와 철학에 관해 사고할 수 있는 지평이 훨씬 넓어지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정치체에 대한 권리’는, 우리 스스로 사유하고 답변해야 하는 ‘어떤 정치체를 구성할 것인가’라는 질문의 다른 말이다.
















